회심과 신앙의 물러남
Ⅰ. 본문 해설
다윗이 기록한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 불립니다. 특히 119편은 객관적인 진리를 전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가는 인간의 내면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회심과 신앙의 물러남, 물러남의 전개, 또 그것을 떨치고 소생하는 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이 진리를 진정으로 알고 실천함으로써 진정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Ⅱ. 회심과 신앙의 물러감
회심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던 한 사람이 어느 순간에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결국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분이시며 자신을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자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피할 길을 주셨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회심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것과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세주께로 피하는 ‘믿음’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A. 회심과 은혜의 부으심
회심의 때에는 최초로 하나님 은혜의 강력한 부으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게 최소한 세 가지의 감각을 주는데 모두 예전에는 없었던 것들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영광에 대한 감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탁월하신 분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감각’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이 죄인인 나를 용서해 주셨음을 아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각’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회심을 하면 옛 자아를 속속들이 미워하는 만큼 하나님을 속속들이 사랑하게 됩니다. 물론 이 사랑은 안전(安全)하지도 않기에 출렁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회심과 함께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완전히 고갈되는 법이 없고 어떤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따라 오래 지속되기도 하고 시들기도 합니다.
B. 신앙의 물러감이란?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물러감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자가 영적인 건강함에서 물러난 그 증거가 내면세계뿐만 아니라 외형적인 삶에도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그것을 ‘신앙의 물러감’이라고 부릅니다. 외적인 효과는 너무도 다양하지만 몇 가지만 예로 들면 신앙생활이 느슨해져서 하나님 앞에 즐겨 참여하던 은혜의 수단들이 주는 즐거움이 줄고, 제일 먼저 개인 경건의 실천이 뒤로 물러갑니다.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생활이 무너지고 더 나아가 세속적인 욕망에 이끌리어 갖가지 죄에 빠지게 됩니다. 이 모든 외형적 물러남은 먼저 마음의 물러남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물러남이 곧 신앙의 물러남인데, 신앙의 자리가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C. 신앙의 물러감과 침륜
성경은 믿는 이들이 침륜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히 10:38-39). 이것은 신앙의 물러감이 극대화된 모습입니다. 침륜의 때에는 삶이 무질서해지고, 그토록 사랑하던 하나님과의 단절과 거리감이 생깁니다. 결국 하나님의 자녀에게 합당한 생활을 버리고 삶의 모든 방면에서 거룩한 의무들을 태만히 하여 하나님의 구원계획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때 신자는 영혼의 고통을 느끼며,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무한한 낯섦이 자신을 감사고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은혜 가운데서 잠시 물러나 마음이 건조해지고 갈급하다가, 한두 번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기도하면 회복되던 영혼의 때와는 다릅니다. 이미 마음으로 많이 물러났기 때문에 몸은 교회에 있어도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영광, 용서, 사랑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고, 말씀과 기도의 실천 역시 사라져 그 의무를 지탱하는 것조차도 힘겹게 느껴지는 상태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다가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쉽게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더 강퍅하게 만듭니다. 또 삶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하고 정리하여 적용함으로써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고칠 수 있는 내적인 은혜의 힘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원망합니다.
시인이 이와 같은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진토는 진흙이나 먼지 혹은 티끌을 가리키는데 구약에서 가장 가치 없는 것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 형상을 닮아 그분과 교통하는 영혼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인의 이런 고백이 단순한 시련과 환난 때문인지, 아니며 그 속에서 자신의 영혼의 더러움을 보았기 때문인지 쉽게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인이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불만을 느끼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깊었던 시인이기에 침체가 더욱 깊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도대체 인간의 마음과 영혼, 삶 가운데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철저히 죄에 대해서는 지고, 하나님께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까지 물러난 것일까요? 신앙의 물러남이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돌아갈 길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돌아가려고 해도 의지의 힘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Ⅲ. 은혜와 지성
신앙의 물러남은 가장 먼저 ‘지성’에서 일어납니다. 중세 신학자들은 인간 영혼의 기능을 낮은 기능과 높은 기능으로 구별하기를 선호했습니다. 곧 자연적인 인간의 욕구를 움직이는 많은 마음과 정신의 작용들은 영혼의 낮은 기능이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은 영혼의 높은 능력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를 비롯한 대부분의 교부들은 영혼의 높은 기능으로 지성을 꼽았습니다. 지성은 인간이 무언가를 알고 이해하는 지적인 능력입니다. 이 지성의 기능은 크게 총명과 이성으로 나뉩니다.
A. 은혜와 총명
첫째는 총명입니다. 우리는 눈으로도 보고 정신으로도 봅니다. 총명은 하나님을 정신으로 보고, 그분에 관한 어떤 사실들이 사진이 찍히듯 마음속에 찍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모르다가 한순간 믿음을 갖고 그분이 살아 계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만일 우리에게 누군가가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눈뜬 소경과 같이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요 9:15)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총명이 맑을수록 인간은 이성으로 알 수 없는 많은 일들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의 진리가 그렇습니다. 천지창조, 인간의 죄, 예수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부활 등의 사건은 논리적인 설득을 통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은혜가 식을 때입니다. 마치 스크린이 뿌옇게 되는 것처럼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진리가 예전처럼 또렷하게 가슴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총명도 흐려집니다. 거꾸로 세상의 감각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주 또렷해집니다. 또한 이것들은 마음에 정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진리가 총명이라는 스크린에 떨어져서 정동을 일으킬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미워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영원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혼과 육체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사랑하게 됩니다. 진리에 자신을 합치시키는 진실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식으면 진리는 희미하게 스크린에 떨어지고, 정동 역시 찰랑거리는데 내 삶을 진리의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합니다.
모든 신앙의 물러감은 바로 여기서 시작합니다. 총명이라는 스크린에 진리가 비춰 정동을 일으킬 때를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성경의 눈물 자국들, 나를 통회하게 만들었던 말씀 앞에서 우리에게는 그렇게 큰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총명이 흐릴 때 우리의 외적인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고 안전해 보여도 그것은 신앙의 물러감의 시작이었습니다.
B. 은혜와 이성
둘째는 이성입니다. 이성은 무언가 하나하나 따져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성을 흔히 신앙의 원수라고 보는데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성을 형으로 보고 신앙이 이성을 따라가려고 할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의 부패로 이성은 절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이는 거듭난 사람들에게도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이 형 노릇을 해야 합니다. “이성아, 결론은 이렇단다. 네가 생각해 보거라.” 은혜가 충만하면 이성이 믿음을 앞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이라는 형이 있어서 이성이라는 동생은 보람을 느끼고, 이성이라는 동생이 있기 때문에 형은 더 잘 믿어야 할 이유를 발견합니다. 은혜가 식으면 여기에 균열이 생깁니다.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믿음을 자기 발아래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마침내 생각의 속임이 들어오면서 신앙의 물어남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합니다.
Ⅳ. 생각의 속임과 신앙의 물러감
A. 내재하는 죄와 생각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을 주인 삼으려는 성향입니다. 여기서 내재하는 죄와 생각의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신자에게도 상대적인 죄가 잔존합니다. 죄는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한 사람에게 거의 영향을 못 미치지만 내버려두면 계속 자랍니다. 그리고 이 성향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이탈하게 만듭니다. 즉 끊임없이 명백한 인과관계를 감추는 ‘속임’과 신자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창조의 목적을 이탈해 살도록 밀어부이는 ‘강압’입니다. 결론적으로 죄는 진리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함으로써 총명을 흐리고, 육욕을 불러일으킵니다. 또 그 정동들에 의해 우리 안에 숨어있던 죄가 힘을 얻으면서 자라나게 만듭니다.
B. 죄가 생각을 공격하는 이유
이처럼 죄가 제일 먼저 공격하는 곳이 바로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생각을 지배하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물러나도록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총명에 맺히고 신자가 감화를 받으면 죄에 빠질 수 없습니다. 경계병을 먼저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효과적인 이유는 자신조차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모를 정도로 외적인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이끌어가는 정신적인 원동력의 역할을 하는 생각의 작용 자체가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감정을 낳고, 감정은 행동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물러날 때는 마음을 적시는 뜨거운 기도가 사라지는 것보다 먼저 진리에 영향을 받는 정신의 기능이 망가집니다. 그러면 위로부터 오는 은혜들이 차단됩니다.
Ⅴ. 생각의 태만과 신앙의 물러감
그러므로 회심과 함께 주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충만한 사랑에 대한 감각들이 마음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은 생각의 태만함 때문입니다. 그것을 교두보 삼아 죄가 우리의 머리를 밟고 가슴을 향해 쳐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A. 생각이 태만해질 때
생각이 태만해질 때는 크게 네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부주의함’입니다. 영혼이 깨어있을 때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미각이 예민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서도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기뻐하실까?”하고 주의가 깊어집니다. 반대로 생각이 태만하면 이런 것들에 부주의합니다.
둘째는 ‘의무에 분발하지 않음’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을 때는 항상 하나님께 사명을 묻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식고 생각이 태만하면 자기 의무에 분발하지 않고 마지못해 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분쟁과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셋째는 죄과 싸우기는 하는데 죄를 이기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부족’합니다. 그 상태에서 진리는 공급되지 않고 육욕적인 것들이 지성을 울리며 정동이 일어나면 인간의 영혼은 매우 외로워집니다.
넷째는 ‘주변에 끊이질 않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세상입니다. 은혜가 있을 때는 하나님을 붙들고 나아가지만, 미끄러질 때는 모든 일은 미끄러지는데 이바지합니다. 잘되면 잘된 대로 방심하고, 미끄러지면 낙심하여 뒤로 물러납니다.
B. 죄의 계획과 물러감
죄의 계획과 물러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죄는 원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신자 안에 깊이 자리를 잡아 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구원을 취소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깨뜨려지고 진리를 인하여 기뻐하는 생활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교회 공동체 안에 많은 관계들에도 영향을 줍니다. 이를 위해 사단은 죄의 자원을 끊임없이 공급해주고 육욕으로 신자의 마음을 정동시키며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신자를 끊임없이 떼어놓으려 합니다. 이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합니다.
Ⅵ. 결론 : 생각을 지키라
먼저 자신의 영혼을 살펴보십시오. 지금 내 영혼에 있는 생각의 기능들이 죄에 속지 않고 올바로 작용하면서 나를 지키고 있는지 말입니다. 문제는 많지만 답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총명의 스크린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비추어 그 진리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출렁거려 회개하게 하고, 기뻐하게 하고, 순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다면 우리 영혼의 물러감은 당연합니다.
우리의 큰 물러감은 이미 작은 물러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중 누가 이렇게 진리의 말씀을 듣는 기쁨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사실 그것이 끝을 알 수 없는 신앙의 물러감의 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잠히 주님께 나아가 기도하십시오. “주님,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마음에 새겨져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말씀이 나를 붙드시는 진실한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다면 내가 움켜쥔 허탄한 것들을 버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