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칼럼 - 2026년 01월 03일 ]
징계를 회복의 기회로 바꾸심
1. 하나님 자녀의 특권 징계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시종일관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산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여야할 이유가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축복을 주실 때는 평안하기 때문에 후고의 염려 없이 열심히 살지만, 좋은 환경들이 오래 계속되면 우리의 마음이 물러가 부패해지면서 하나님 섬기기에 좋지 않은 환경이 되며 죄악 가운데서 순결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좋고 귀한 것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유사하지만, 은혜로부터 멀어져 부패해지게 되면 영적인 총명이 흐려져 생각과 가치관의 변질이 오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총명 때문인데 영혼, 생각, 마음의 기능, 영적인 총명이 동시에 어두움에 잠기게 되면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돌이킬 계획을 갖고 징계하십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8)라는 말씀처럼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징계 중에 있을 때는 특권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저 고통스럽게만 느껴집니다.
2. 징계 가운데서 아파하는 자녀들
오늘 시인이 당하는 고난은, ‘다시 살리신다’, ‘땅에서 나를 일으키신다’ 등등의 구절을 보아서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징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을 직역하면 20절은 “그가 넘치는 괴로움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재앙들도 보여주셨다. 그랬는데 당신이 돌아오셔서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리고 그 땅의 깊음들로부터 당신이 돌이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올라가게 하십니다.”로 해석될 수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그 재앙이 수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정도에 있어서 심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재앙을 당할 때 신자들은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드리기 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양심이 먼저 발동하여 율법과 함께 짝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징계 받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절망하고, 마음은 굳어져 처음의 두려움은 잠깐이고 갈 때까지 가자는 식의 반응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징계를 당할 때 졸지에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충분히 돌이킬 기회, 예를 들어 말씀, 선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 권고하신 후에 징계하십니다.
3. 징계의 아픔을 회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시기 시작할 때 우리의 상태는 의지하던 자원이 끊어졌거나 끊어지고 있는 상태일 때가 많은 이유는 징계가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는 믿음을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성이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우리가 의지하던 이 땅의 자원을 끊으시는 것입니다. 많은 재앙을 만날 때 우리가 괴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징계의 도상에서 하나님은 그 고난의 의미를 바꾸어 놓으시는 분이시기에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하는 징계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창조의 선하신 목적으로 이탈한 우리를 원래 선한 자리로 돌려놓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여 최종적으로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교정행동입니다. 그 징계의 계획에 있어 구체적인 내용은 “나를 살리시는 것”이고 이것은 영적인 회복을 의미합니다. “땅의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는 외면적긴 존귀와 영광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인이 징계 가운데서 영혼과 사회적인 아름다움, 지위, 소유를 다 잃어 버렸지만 하나님은 다시 반전드라마를 펼치셔서 당신을 돌이키십니다.* 하나님에게 ‘돌이킴’을 외쳤던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죄에서 돌이킨 자들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징계 중에 있다면 지금 참회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징계를 회복의 기회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길 바랍니다.
*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시 71:21)
[ 스펄전과 함께 QT - 2026년 01월 03일 ]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이사야 49 : 8)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총체요 언약의 실체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선물 중 하나로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이 얻은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짐작이나 하십니까?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라는 단어 한마디에 담겨 있는 무한성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다음에는 "완전한 인간"에 대해 그리고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안에 담겨 있는 그 모든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왜냐구요? 하나님이며 동시에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갖고 계신 모든 것과 가지실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여러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이 여러분 손으로 넘어가 영원토록 여러분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신 복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전지전능하시며 어느 곳에나 다 계신데, 이런 영광스럽고 위대한 속성들이 모두 다 여러분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능력을 갖고 계십니까? 그 능력이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 능력이 지금 여러분을 강건하게 붙들어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원수들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끝날까지 도와주며 지켜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을 갖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의 가슴 속에 있는 그 모든 사랑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언제든지 주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의 대양 속으로 뛰어들어가 "이 사랑은 내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공의로우십니까? 이것은 좀 엄한 속성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아무튼 공의도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공의에 따라 은혜 언약 안에서 여러분에게 약속된 모든 것들이 정말 여러분의 것이 되도록 지켜보고 계실 테니까 그렇습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 으로서 갖고 계신 모든 것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완전한 인간 그리스도를 몹시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용납하셨다는 것은 곧 여러분을 용납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그리스도를 향해 갖고 계시던 그 사랑을 지금은 바로 여러분을 향해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시고 그 율법을 더욱 온전하게 만드셨을 때, 예수님이 이루신 그 온전한 의가 이제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 의가 여러분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 언약 속에 계십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것이라니 정말 큰 위로가 됩니다! 또 구세주가 나의 구세주라니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천국의 어린양 안에 있는 저는 지극히 행복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만 들어도 제 가슴이 기뻐 뜁니다.”
[ J.I패커와 함께 QT - 2026년 01월 03일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 : 1)
성경을 믿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흥미와 열망을 일으키는 관심사가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갈망은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한다. 우리가 중생이라고 말하는 마음의 변화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사랑하게 되고 그 뜻을 행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은 생각만 해도 그들의 마음을 몹시 슬프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를 표하며 사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며 실로 그들이 열망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이 열망은 점점 더 강해진다. 따라서 자연히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행할 수 있기를 원한다(1986g:20).
묵상: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열망한다.
[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 2026년 01월 03일 ]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신 33: 26)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대담한 주장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에베소서,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면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9)라고 가르쳤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동일한 시민이 되거나(엡 2:11-19), 이스라엘에 접붙임(롬 11:17-25)됨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 속해 있으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사람이라는 것이다(갈3:29).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갈 3:16)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뜻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사람이라는 것이다(갈 3:29, 16).
그렇다면 바울은 구약을 새롭게 해석했단 말인가? 아니면 본래 구약의 가르침이 그러한가? 구약은 이방인도 참 유대인이 될 수 있고 혈통으로 유대인인 자가 참 유대인이 안 될 수도 있다고 가르치는가? 우리가 구원받은 근거는 우리가 이스라엘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가르친다. 바울이 구약을 잘못 해석했다면 문제는 커진다. 바울은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 리 없다.
창세기 17장 18-25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았고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구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8-19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단지 아브라함의 혈통만 가지고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리브가도 쌍둥이를 낳았는데 에서가 아닌 야곱이 유업을 이었다(창 25:23, 롬 9:10-13).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9장 8절에서“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레위기 26장 41-42절은 “그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라고 말하면서 유대인들이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2장 29절서 지적한 것처럼, 비록 혈통으로는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심령이 변화하지 않으면 약속에 따라 유업을 이을 수 없다.
신명기 10장 16-17절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라고 명령했다. 하나님께서는 혈통이나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이 할례를 받았는지 보신다. 예레미야서 4장 4절도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라고 말한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지 않으면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의 분노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25절에서 마음이 할례 받지 못하면 유대인의 할례가 무할례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예레미야서 9장 25-26절은“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거하여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은 자들에게라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라고 말한다. 이 민족들은 양피 대신 관자놀이의 머리를 짧게 깎아 단지 할례의 모양만 냈다. 놀랍게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이방 민족과 같은 부류로 취급했다. 왜냐하면 마음이 아닌 육체에 행한 할례는 이방인들이 머리털 깎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할례는 무할례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로마서 2장 25-29절에서 구약을 잘못 해석 한 게 아니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들이 가르친 대로 참 유대인에 대한 교훈을 이끌어내려 했다. 참 유대인이란, 육체적 할례를 행한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할례를 행한 사람이다(신 30:6).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다(갈 3:7, 29).
그러면 이 진리는 어디에 적용할 수 있는가? 바울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할례의 역사를 고찰하기 위해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성도들에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겸손한 마음과 소망을 가지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는 당시 이방인 형제들이 이스라엘에서 사역을 할 때 교만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래서 이방인 형제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던 것이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 11:18).
우리 이방인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늦게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통 상속인과 똑같이 사랑받게 되었으므로 겸손한 가운데 소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구속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게 되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 이것이 구속의 목적이다.
[ 은혜와 사명 - 2026년 01월 03일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기뻐하심을 확증하셨습니다.
[ 성구 ]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11)
[ 내용 ]
매슬로우의 욕구계층 이론은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고 있습니다. 1단계부터 5단계 욕구를 차례대로 서술하면 먼저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 자기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하위욕구가 충족되지 아니하면 상위 욕구를 추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근래에 와서 학계에서는 이 이론에서 말하고 있는 상위욕구와 하위욕구가 사실상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의 특성을 설명하는 데는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메시지는 신성과 동시에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음성이었습니다. 이러한 확증의 메시지는 예수님께 큰 힘이 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막 시작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또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기뻐하신다고 확증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삶의 새로운 시작과, 사명의 길에 들어서는 시점에서는 확증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욕구에 대해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중대한 사명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당신의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연약한 육체를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사명자의 삶이 시작되었을지라도 우리는 때때로 생명의 위협과 자아 존중감의 위협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서도 이런 위협은 늘 있었습니다. 열심을 품고 예수님을 좇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고, 그분이 하시는 일과 하실 일에 대해 아무리 이야기해 주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항상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쫓겨 피해 다니시거나 맞서야 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외롭고, 두려우셨을까요? 예수님뿐만이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이 땅에서는 그 누구도 헤아려줄 수 없는 외로움과 생명의 위협 가운데서 사역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비롯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위협 가운데서도 끝까지 안전하게 자신의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고 그들의 사역을 기뻐하신다는 확증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위기의 순간마다 그 말씀을 기억하였고, 그렇게 믿음으로 반응하며 살아갈 때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존재, 여러분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위협을 받고 있습니까? 그래서 더 앞으로 나가야 하는 여러분의 발목이 묶여 있습니까? 사명이 시작될 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메시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사명의 자리에서 미끄러지려 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더욱 든든히 하십시오.
[ 묵상 ]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신다고 확증해 주신 자리입니까? 그런 확신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100일 교리 묵상: 은혜와 사명 - 부흥과개혁사 ]
[ 은혜와 사명 ]
[ 청교도묵상 - 2026년 01월 03일 ]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경건한 열심에서 - 토마스 왓슨
경건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은
자신이 구원받은 것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이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그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데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나는 것이 그리스도께는 영광이다.
별 하나하나가 하늘에 광채를 더해 주듯이,
회심자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을 불어나게 하는 지체이며,
그분의 왕관을 장식하는 보석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는 더 커질 수 없으나,
그가 중보자라는 점에서는 더 커질 수 있다.
구원받은 사람이 늘어갈수록,
그리스도는 더욱더 높아지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더 빛나기 때문이 아니라면
천사들이 죄인의 회심을 왜 기뻐하겠는가?(눅 15:10)